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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7(3)

Views : 1,143 2015-10-23 14:55
자유게시판 12709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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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결전을 별렀고, 백제는 긴장한 가운데 성충을 파견하여 동맹을 맺었다.
아마도 근심이 가장 큰 나라는 고구려가 수나라와 싸우는 틈을 타 야금야금 땅을 차지했던 신라였을 것이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라는 당나라에 굴욕적인 자세로 통맹을 요청하였다 스스로 속국이 될 것을 맹세하며 문화와 정치의 모든 면에서 당을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신라의 사대 노선은 향후 겨레에게 속민(屬民)의 굴레를 씌우는 연원이 되었다.

 당태종 이세민은 신라의 귀복을 기꺼이 환영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하던 차에 신라는 배후가 됨과 동시에 동정(東征)의 구실까지 되었던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염탐도 할겸 이세민은 사신 상리현장을 고구려로 파견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어서 군사를 거두고 신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어라!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짐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 그대들의 죄를 물으리라!"
 상리현장이 보장왕과 연개소문 앞에서 근엄하게 태종의 조서를 읽었다.

보장왕은 좌불안석이었으나, 연개소문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사신을 꾸짖었다.
 “수나라가 우리를 침략한 뜸을 타 신라가 우리 성읍 500리를 가로챘다. 그것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미 지난 일이 아니오. 그렇게 따지자면 고구려의 요동땅은 원래 한나라의 것이니 우리에게 돌려줘야 옳지 않겠소이까?"
 상리현장의 말에 연개소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찌하여 요동 땅이 한족의 것이란 말인가!
그 땅은 오래 전단군 성조의 백성들이 살던 곳이다.
한때 한의 도적 유철이 그곳을 빼앗았으나 우리 고구려의 선왕들이 다시 찾았다.
요동 땅뿐만 아니라 너희 나라의 영주, 유주도 모두 우리 선조들이 살던 곳이다.
마땅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땅을 되찾을 것이다.

네 말대로 하자면 그 땅을 스스로 우리에게 돌려줘야 옳지 않겠느냐?"
 상리현장은 겁에 질려 대답도 못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 이세민은 다시 사신 장엄을 보내 연개소문을 회유하려 했으나, 연개소문은 장엄을 굴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이세민은 마침내 동진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대신을 해쳤으며, 백성에게 나쁜짓을 하였고, 나의 명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노라!”
 이세민은 이렇게 구실을 갖다 붙였으나, 실상은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칠 것을 두려워하여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선수를 치고자함이었다. 이미 고구려의 국정을 장악한 연개소문을 그대로 두면 반드시 내실을 다져 중원을 토평할 것을 이세민은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편 고구려만 정벌한다면 나머지 나라는 저절로 손아귀에 들어오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당의 고구려 침략은 20년간이나 준비된 것이었다.
이세민은 군사를 기르며 때를 노렸다.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들의 믿음도 얻었다.
그러나 막상 동진의 깃발을 들자 당나라의 중신들은 반대하였고, 여론도 그와 같았다.
수나라의 장수로 참전했던 퇴역 장수는 당이 고구려를 이길 수 없을 거라며 이세민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뜻을 거둘 이세민이 아니었다.
고구려, 어쩌면 연개소문과의 한판 싸움은 오래 벼르던 일이었다.
그는 반드시 고구려를 평정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여러 왕족들의 동의를 구했다.
호족들에게 두둑한 선물을 주어 설득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수(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수가 고구려에 진 원인을 꼼꼼히 분석하였다.

『조선상고사』에 그 글이 실려 있다.

 첫째, 수양제가 정병을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많은 군사를 일으켜 그 숫자가 400만이나 되었는데, 여기에는 실제로 싸울 만한 군사는 수십만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당)는 10년간 훈련한 군사 가운데서도 빼어난 자로 20만(수군은 별도)을 고른다.
 
둘째, 수양제는 섣불리 평양으로 쳐들어갔다가 길이 끝어져 양식과 무기를 받지 못해 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동 지방부터서서히 쳐들어 간다.
 
셋째, 수나라군은 군량을 제대로 운반하지 못해 졌다.
우리는 바다와 육지로 식량을 옮기되, 병사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 소와 마차를 이용하고 식량이 떨어지면 그 짐승을 잡아먹는다.
 
넷째, 수양제가 진 원인은 다른 나라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뒤를 어지럽게 하면서 쳐들어간다.

 또 『삼국사기』에는 이세민이 대고구려전을 선포하고 승리를 확신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열거하였다.
 옛날의 수양제는 아랫사람에게 간학하게 굴고 고구려 왕은 백성을 인애하였다.
어지러움을 생각하는 군대가 안화(安和)한 무리를 쳤으므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간략히 필승의 도를 말하자면 다섯 가지가 있다.
 그 1은 대(大)로써 소(小)를 치고,
2는 순(順)으로써 역(초)을 토벌하는 데 있으며,
3은 안정된 다스림으로써 난시(亂時)를 틈타고,
4는 편안함으로써 저들의 수고로움을 치며,
5는 기쁨으로써 원한을 치는데 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이기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포고하노니 의구치 말라.

645년 봄, 이세민은 아래와 같이 큰소리치며 정병 2만을 이끌고 요동을 향해 진군하였다.  “무릇 고구려는 이제 주머니 속의 구슬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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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5 [쪽지 보내기] 2015-10-23 20:07 No. 1270920611
58 포인트 획득. 축하!
우리의 역사이야기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감사~ ^^
데이지5 [쪽지 보내기] 2015-10-23 22:11 No. 1270920831
이 글을 읽으니 예전에 KBS에서 했던 대하사극드라마 "대조영"이던가요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임호 분)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요 
 
이방인 [쪽지 보내기] 2015-10-23 23:25 No. 1270920940
38 포인트 획득. 축하!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글쓰기 힘드실텐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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